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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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9791193044377
출판사
위고
저자명
최현희
출시일
2025년 10월 20일 출간
-
+
총 합계금액
0 원
제품상세 정보
| ISBN | 9791193044377(1193044375) | ||
|---|---|---|---|
| 쪽수 | 344 | ||
| 크기 | 128*205mm | ||
책소개
서툴고 미숙한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초등학교 교실. 그 조용히 닫힌 문 너머에 교사들이 있다. ‘선생님’이라는 말에 따라오는 기대와 책임을 무겁게 지고, 아이들의 동그란 눈을 마주하며 교사들은 매일 수업을 연다. 초등학교 교실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혼란하다. 작고 서툰 인간의 마음들이 뭉쳤다 흩어졌다, 부딪히고 부대끼는 교실은 종종 엉킨 실타래처럼 도무지 풀기 어렵다. 경직된 교직 문화와 학교 환경은 그 실타래를 더 세게 조여버린다. 교사 최현희는 전국의 교실과 그곳에 홀로 ‘던져진’ 교사들을 떠올리며 자주 생각했다. ‘다들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몸은, 마음은 괜찮으십니까.’ 그는 자신의 교실을 먼저 열어 보이기로 했다. 매일의 수업을, 학교 교육의 조건과 한계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을 글로 적었다. 교사들 간의 교류가 갈수록 줄어드는 교육 현장에서 최고샘의 기록은 교사들에게 일종의 공개 수업이 되었다. 많은 현직 교사들이 그로부터 노하우와 힘을 얻었고 좋은 교육은 교사 혼자 노력한다고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최고샘의 교실을 글로 만나며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는 그렇게 버티고 애쓰며 쌓은 기록들이다.
저자소개
‘마중물샘’으로 살아가는 초등학교 교사. 학생들과 연결되는 순간을 기대하며 매일 교실에서 분투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끝없이 소진되는 날에는 어쩌자고 이 일에 뛰어들었을까 후회하다가도, 웃고 울며 기어코 성장해내는 아이들을 볼 대마다 학교를 떠날 수 없음을 실감한다. 교사는 외롭고 쉽게 소진되는 직업이다. 서로 배우고 끈끈히 연대해야 할 교사들 간의 교류가 점점 사라져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먼저 자신의 교실부터 열어 보이기로 결심했다. 학생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는 학교 환경에서 교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며 매일 기록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사를 그만둘까 고민하는 지친 동료들에게 조금의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4년 동안의 교실 일기를 책으로 묶었다. 그렇게 서로의 교실을 열어 보이며 함께 길을 찾자고 제안한다. 지은 책으로 우울증과 암, 휴직과 복직을 지나 다시 교실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담은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가 있다.
목차
들어가는 글
다시 만난 학교 _2021년 10월 복직 첫 학기 열심히 하려는 마음에는 잘못이 없다|복직 후 첫 수업|민기|전국의 모든 초등학교 저학년 담임선생님들의 안녕을 빕니다|교실이라는 공공장소|서로의삶을 교실로 가져와 연결하는 일|민기 책상|학교에서 마음을 지켜낸다는 것|저학년 수업의 열쇠|가장 중요한 수업의 자원은|긴급 학급 회의|안아봐도 돼요?|철봉 낙상 사고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_2022년 척추 부상 후 복직 1학년 배려 수업|일 년을 울고 웃게 될 교실에서|첫날|업무만 하다가 4시|아침의 교실|모두 16명|외톨이|작은 것을 붙들기|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달팽이|올해만큼은|난장판 속의 기쁨|우린 그냥 섞어서 서요|사이버폭력 예방 교육|베테랑의 쿨다운|후배 교사의 방문|어떤 보호자|내가 되려고 하는 내가 되는 연습|존중하는 대화법|역차별 감수성 예방 교육|어려운 날|오래 가르치고 싶어서|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한 선생님께
어떻게 교사의 마음을 지킬까 _2023년 휴직 휴직의 진짜 이유|눈물|새 길|휴직연장신청|참담한 희망|내 아이의 선생님
사랑이라는 전문성 _2024년 다시 교과전담 교사 기시감|노래와 눈물|별이 담임선생님께 긴 편지|배움의 조건|사랑을 따라가면 쉽다|내가 하는 일의 가장 좋은 점|엉킨 실타래 풀기|혐오의 반대편에 서기|과학 시간 성교육|동료 장학|화가 나더라도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기|사랑이라는 전문성|선생님은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아요|각자의 바다에서 웃었다|무대가 된 과학실|눈 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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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학교에 대한 희미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분들에게 권한다. 학교의 탄생은 가능하고 이미 어딘가에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단단히 설득당했다.” _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낡은 대화만 가득한 학교에서 나는 고장난 라디오가 되기를 택했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교과서에만 있지 않다. 왜 친구를 ‘지방 덩어리’라고 놀리면 안 되는지, 남학생이 분홍색을 좋아해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동성애자’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왜 잘못인지 배워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는 표현에서 혐오의 씨앗을 짚고 그것을 볼 수 있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그것이 “교과서 속의 지식과 조금 다른 종류의 배움”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학교는 가장 깨어 있어야 할 공간임에도 느리고 보수적이어서, 최고샘의 노력에는 따가운 시선이 따라붙기도 한다. 어느 날엔 학교 밖의 사람들이 몰려와 ‘페미니스트 교사’를 학교에서 내쫓으라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무섭게 불어나 도무지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때 최고샘은 잠시 휴직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다시 돌아온 지금, 그는 여전히 낡은 관습에 머무르려는 교사들 사이에서 계속 손을 든다. 돌아오는 것이 무감한 눈길과 지친 한숨뿐이라 해도, 수년째 같은 말만 반복하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그는 손을 들고 말하기를 택한다. 지난 트라우마에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하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최고샘의 단단한 모습에 누군가는 용기를 얻고, 자신의 일터에서 또 하나의 고장난 라디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선생님이 학생을 사랑하고, 도전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찾아낸 하나의 길
학교는 쉬운 일터가 아니다. 집중 유지 시간이 고작 15초인 저학년 교실, 엄청난 소음과 소동이 벌어지는 그 안에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긴다. 힘든 수업을 마친 교사의 얼굴을 보면 “활력과 생기가 쪽쪽 빨려나간”, 그야말로 “죽음의 색과 톤”이다. 오늘의 수업이 무사히 흘러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교사들 사이에서는 동료 참관 수업이 열려도 서로의 수업을 보지 않는 게 예의이자 불문율이 되었다. 저연차 시절 최고샘은 정년을 앞둔 선배 교사의 수업을 맑은 눈으로 참관하다가 단단히 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래서 최고샘이 흔쾌히 열어준 교실 문이 반갑게 느껴진다. 빼꼼 열린 그 문으로 들여다본 교실에는 분투와 씨름이 있지만, 기쁨과 반짝이는 장면도 분명 있다. 눈을 감고 각자의 바다로 상상 여행을 떠나보는 6학년 과학 시간, 똑같은 동작을 한 몸처럼 하며 마음을 맞춰보는 2학년 즐거운생활 시간,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아이들이 조용히 집중하는 사이버폭력 예방 수업, 그러다 아이들 머리 위로 깨달음의 느낌표가 ‘띵’ 떠오르는 순간들. 최고샘은 때로 조금만 덜 열심히 하자고, 체력을 아끼며 일하자고 다짐하지만 아이들이 다가오면 어느새 “스팀 팍팍 나오는 다리미처럼” 마음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만다. 그런 최고샘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울고 웃으며 자라난다.
하지만 그 난장 속에서도 꼭 웃음이 나는 일이 생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참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작은 가르침이 큰 결과로 돌아오는 때가 있고 “난 내 직업이 정말 좋아” 하고 꿍얼거리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런 걸 건져 올려 글로 쓰는 것이다. 난장판 속에도 기쁨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어떤 기쁨이었는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하려는 것이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사랑 없이는 버틸 수 없는 공간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고 매일 말할 수 있다면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저는 화요일이 제일 좋은 요일이에요. 선생님을 만나서요.” 최고샘은 학교에 언제까지 있을지, 교사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꼭 하얀 모니터 앞에 앉았다. 하루치의 빛나는 순간들이 없었던 일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쉬워서다. 이제는 얼마간의 노련함을 갖춘 최고샘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직은 유지하면서 교사의 마음을 잃는 일이다.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잠깐은 미워도 결국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 최고샘은 그 마음 하나로 오늘도 교실에 선다. 사랑이라는 전문성을 손에 꼭 붙들고 하루하루 나아간다. 그러나 이 책은 교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교실과 교사를 안전하게 지킬 최소한의 시스템조차 부재한 우리 교육의 현실을 드러내고, 지친 교사들에게 조용히 손을 내민다. 책의 제목인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는 최고샘이 가르쳤던 아이의 일기에 적힌 문장에서 왔다. 이 문장이 최고샘의 마음에 콕 박혀 하나의 글이 되고, 더 나아가 마냥 희망차지만은 않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은 학교가 기본적으로 마음에 들기 어려운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수업이 정말 재밌었다고,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어 교사들은 마지막 힘을 낸다. 교사에게도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고 읊조리는 순간이 더 많이 모이기를, 그 순간들의 힘이 밀어 올리는 동력으로 계속해서 교실에 설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부디 나의 글에서 ‘우리 교육의 희망’을 찾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교육의 희망은 시스템의 개선에 있다. ‘좋은 교사’는 열악한 시스템에서도 눈앞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크게 보고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하려고 하루하루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니 교사를 칭찬하기보다 교사와 연대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학교에 연루되기를 부탁드린다. 나의 기록이 ‘훌륭한 교사’가 학생을 변화시키고 희망찬 교육을 일궈낸다는 이야기로 읽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낡은 대화만 가득한 학교에서 나는 고장난 라디오가 되기를 택했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교과서에만 있지 않다. 왜 친구를 ‘지방 덩어리’라고 놀리면 안 되는지, 남학생이 분홍색을 좋아해도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동성애자’라는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왜 잘못인지 배워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는 표현에서 혐오의 씨앗을 짚고 그것을 볼 수 있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그것이 “교과서 속의 지식과 조금 다른 종류의 배움”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학교는 가장 깨어 있어야 할 공간임에도 느리고 보수적이어서, 최고샘의 노력에는 따가운 시선이 따라붙기도 한다. 어느 날엔 학교 밖의 사람들이 몰려와 ‘페미니스트 교사’를 학교에서 내쫓으라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무섭게 불어나 도무지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때 최고샘은 잠시 휴직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다시 돌아온 지금, 그는 여전히 낡은 관습에 머무르려는 교사들 사이에서 계속 손을 든다. 돌아오는 것이 무감한 눈길과 지친 한숨뿐이라 해도, 수년째 같은 말만 반복하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그는 손을 들고 말하기를 택한다. 지난 트라우마에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하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최고샘의 단단한 모습에 누군가는 용기를 얻고, 자신의 일터에서 또 하나의 고장난 라디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선생님이 학생을 사랑하고, 도전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찾아낸 하나의 길
학교는 쉬운 일터가 아니다. 집중 유지 시간이 고작 15초인 저학년 교실, 엄청난 소음과 소동이 벌어지는 그 안에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긴다. 힘든 수업을 마친 교사의 얼굴을 보면 “활력과 생기가 쪽쪽 빨려나간”, 그야말로 “죽음의 색과 톤”이다. 오늘의 수업이 무사히 흘러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교사들 사이에서는 동료 참관 수업이 열려도 서로의 수업을 보지 않는 게 예의이자 불문율이 되었다. 저연차 시절 최고샘은 정년을 앞둔 선배 교사의 수업을 맑은 눈으로 참관하다가 단단히 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래서 최고샘이 흔쾌히 열어준 교실 문이 반갑게 느껴진다. 빼꼼 열린 그 문으로 들여다본 교실에는 분투와 씨름이 있지만, 기쁨과 반짝이는 장면도 분명 있다. 눈을 감고 각자의 바다로 상상 여행을 떠나보는 6학년 과학 시간, 똑같은 동작을 한 몸처럼 하며 마음을 맞춰보는 2학년 즐거운생활 시간,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아이들이 조용히 집중하는 사이버폭력 예방 수업, 그러다 아이들 머리 위로 깨달음의 느낌표가 ‘띵’ 떠오르는 순간들. 최고샘은 때로 조금만 덜 열심히 하자고, 체력을 아끼며 일하자고 다짐하지만 아이들이 다가오면 어느새 “스팀 팍팍 나오는 다리미처럼” 마음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만다. 그런 최고샘의 교실에서 아이들은 울고 웃으며 자라난다.
하지만 그 난장 속에서도 꼭 웃음이 나는 일이 생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참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작은 가르침이 큰 결과로 돌아오는 때가 있고 “난 내 직업이 정말 좋아” 하고 꿍얼거리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런 걸 건져 올려 글로 쓰는 것이다. 난장판 속에도 기쁨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어떤 기쁨이었는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하려는 것이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사랑 없이는 버틸 수 없는 공간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고 매일 말할 수 있다면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저는 화요일이 제일 좋은 요일이에요. 선생님을 만나서요.” 최고샘은 학교에 언제까지 있을지, 교사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꼭 하얀 모니터 앞에 앉았다. 하루치의 빛나는 순간들이 없었던 일처럼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쉬워서다. 이제는 얼마간의 노련함을 갖춘 최고샘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직은 유지하면서 교사의 마음을 잃는 일이다.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잠깐은 미워도 결국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 최고샘은 그 마음 하나로 오늘도 교실에 선다. 사랑이라는 전문성을 손에 꼭 붙들고 하루하루 나아간다. 그러나 이 책은 교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교실과 교사를 안전하게 지킬 최소한의 시스템조차 부재한 우리 교육의 현실을 드러내고, 지친 교사들에게 조용히 손을 내민다. 책의 제목인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는 최고샘이 가르쳤던 아이의 일기에 적힌 문장에서 왔다. 이 문장이 최고샘의 마음에 콕 박혀 하나의 글이 되고, 더 나아가 마냥 희망차지만은 않은 이 책의 제목이 된 것은 학교가 기본적으로 마음에 들기 어려운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수업이 정말 재밌었다고,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어 교사들은 마지막 힘을 낸다. 교사에게도 “오늘의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고 읊조리는 순간이 더 많이 모이기를, 그 순간들의 힘이 밀어 올리는 동력으로 계속해서 교실에 설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부디 나의 글에서 ‘우리 교육의 희망’을 찾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교육의 희망은 시스템의 개선에 있다. ‘좋은 교사’는 열악한 시스템에서도 눈앞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크게 보고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하려고 하루하루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니 교사를 칭찬하기보다 교사와 연대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학교에 연루되기를 부탁드린다. 나의 기록이 ‘훌륭한 교사’가 학생을 변화시키고 희망찬 교육을 일궈낸다는 이야기로 읽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책속으로
교직은 가르치는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할수록 늪에 빠지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복직을 앞두고, 열심히 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누르려고 애를 썼다. 열심히 하면 안 돼. 그랬다가 또 다쳐. […] 그러나 열심히 안 하겠다고 열심을 내는 일이 조금 지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는 잘못이 없다. 그저 마음이 너무 앞서 달려가지 않도록, 혹여 잘 안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도록 하고, 실망하더라도 스스로를 다독여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17면)
나는 잠깐 혼돈의 교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 말이 끼어들 틈도 없었지만 솔직히 어떤 말을 할 엄두도 안 난다. 엄청난 소음 속에서 나 홀로 작전 회의를 하는 기분으로 학생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동시에 쏟아지던 말들을 하나씩 펼쳐보면 이렇다. -선생님 뭐 하세요? -이 바보야! (소리 지름) -네가 더 바보야! (더 소리 지름) -선생님 도덕 수업 안 해요? -이러다 도덕 수업 언제 해, 날 새겠네.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반이 원래 이래요. -(내 발의 붕대를 발견한 학생이) 선생님 발 다쳤어요? -왜 다쳤어요? -언제 다쳤어요? (29면)
그동안 여러 교사와 강사들이 그 반에 들어갔음에도 쓰레기 산을 어쩌지 못한 이유는, 조금만 손을 대도 민기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그냥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고 했다. 물건을 던지고 발을 쿵쾅거리며 엄청난 소동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라는,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암묵적인 원칙이 생긴 듯했다. (74면)
학교에는 욕할 거리가 많다. 만 하루, 스물네 시간을 나에게 줄 테니 학교의 문제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나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면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의 문제는 어떤 한두 사람의 잘못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오랜 문화와 제도, 구조 안에 문제의 원인과 결과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선적인 해결책을 찾기도 어렵다.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그 복잡한 맥락을 함께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77-78면)
유난히 힘든 반의 수업을 마친 교사의 얼굴을 보면 활력과 생기가 쪽쪽 빨려나간 게 확연히 느껴진다. 죽음의 색과 톤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던 생기가 수업 몇 시간 만에 자취를 감추는 건 좀 무서운 일이다. 교사는 단명한다는 말은 진실일 것 같다. (78면)
학교 밖의 아이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애틋해진다. 학교에서 보지 못한 표정을 발견할 때가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은 학교에서 약간 긴장하며 나름의 사회생활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도 그럴 것이다. 다들 애를 쓰고 있다. 대견하고 안쓰럽고, 마음이 짠해진다. (119-120면)
지난해 1학년 선생님이 학생들을 줄기차게 성별로 구별하여 학급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공책이나 반티, 초콜릿 같은 간식을 줄 때도 여자와 남자를 반드시 구별해서 나눠주었다고 한다. 당연히 여자는 핑크색 남자는 파란색이었을 것이고, 줄은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로 섰을 것이다. 학교에는 집착적으로 학생들을 성별로 ‘분류’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것이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는 별로 없다. 어제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숫자를 따로 적게 되어 있는 학급안내판 양식을 받았다. 나는 ‘남학생 0명, 여학생 0명’을 지우고 ‘모두 16명’이라고 썼다. (122-123면)
“운동회를 진행하실 때 학생들 앞에서 외모를 평가하는 말, 특히 남자는 잘생겼다 여자는 예쁘다 하는 식으로 성별화된 외모 칭찬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약간 누르면 재생되는 기계 같은 것이다. 수년째 같은 말만 반복하는 고장난 라디오 같은 것이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 어떻게 말할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밖으로 내보낼 때는 늘 약간의 용기와 약간의 체력 소모를 감수할 결심이 필요하다. (174-175면)
저학년을 가르치는 게 좋았다. 학습의 기초, 아니 어쩌면 삶의 기초를 하나씩 가르쳐주는 일이 보람 있었다. 책상에 앉을 때는 앉은키가 가장 커지게 앉아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발바닥이 단단하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자기 말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 친구들끼리 갈등이 생길 때는 어떤 마음이 들고 그런 마음은 어떻게 표출하는 게 좋은지, 친구들과는 왜 싸울 수밖에 없는지, 나도 어릴 때는 누구랑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외로웠는지. (195-196면)
한 무리의 아이들과 헤어지고 한 층 더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지훈이를 마주쳤다. 깜짝 놀란 지훈이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선생님! 진짜 선생님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언제 와요? 나도 눈물이 난다. 아니 무슨 열 살이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고 이리 서럽게 눈물을 쏟나 싶어서. 힘든 마음을 이고 사느라 그럴 테다. 힘들 때는 그렇다.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면 눈물이 난다. 어른도 아이도 다 그렇다. 지훈이는 교사를 무척 힘들고 고되게 하는 학생이다. 나에게도 쉽지 않았지만 가장 힘든 건 본인일 것이다. (220면)
서이초 사건을 보며 그해가 떠오른 건 녹초가 되었을지언정 나에게는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3월부터 10월까지, 나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1년 내내 고생해도 안 될 수도 있다. 동연이가 끝내 나를 노려만 보다가 중학교로 갔을 수도 있다. 그저 기다리고 인내하고 기회를 주고, 지켜보고 손을 내밀고 좋은 환경이 되어주는 것. 그게 교육의 전부이다. 그러면 그 안에서 아이는 결국 자란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십수 년의 교직 생활에서 내가 믿는 건 그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교사로서 견디고, 버티고, 시도하고, 지치고, 화내고, 실망해볼 시간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도와주지 못할 거면 시간이라도 줬어야지. 시간과 기다림은 교육의 기본이자 전부인데 그걸 갖질 못하고 가셨다. (227면)
-그런데요, 왜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싫어하고 차별하는 거예요? 열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막연히 얼굴을 찌뿌리거나 수간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고. 열 살 아이들이 응당 할 수 있는 질문을 뺏어가버린 사람들이 세뇌의 주범이다. (260-261면)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 상황이 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부릅뜬 눈들, 찌푸린 미간들, 빳빳하게 세운 몸들, 날선 목소리들로 가득 찬 교실을 상상하면 된다. 이것은 엉킨 실타래 같은 것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단단하고 복잡하게 얽혀 보기만 해도 답답해지는. (270면)
개인의 삶은 오직 개인의 것일 수 없어서 우리는 결국 서로를 돌보고 세상이 나아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가 교실에서 개별 교과 연구에만 최선을 다할 뿐 자신과 학생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세계의 부정의를 바로잡는 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면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교사는 교실 밖으로 나가 부조리한 세상과도 싸워야 한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을 교실 밖에서 실천하지 않는 교사의 말이 얼마나 가볍고 공허한 것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자주 생각한다. (333-334면)
학교를 둘러싼 환경이 점점 나빠진다. 학교에 따라서는 태평하게 교실 일기를 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교실도 있을 것이다. 교사와 학교를 통째로 흔들어대는 악성 민원을 피할 수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현 시대 교사가 갖는 최대치의 행운이 되어버렸다. […] 갈수록 힘들어지는 학교에서 교사의 마음을 놓지 않기 위해 오늘의 희망을 버텨내고 있을 동료들께 감사와 존경,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334면)
나는 잠깐 혼돈의 교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내 말이 끼어들 틈도 없었지만 솔직히 어떤 말을 할 엄두도 안 난다. 엄청난 소음 속에서 나 홀로 작전 회의를 하는 기분으로 학생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동시에 쏟아지던 말들을 하나씩 펼쳐보면 이렇다. -선생님 뭐 하세요? -이 바보야! (소리 지름) -네가 더 바보야! (더 소리 지름) -선생님 도덕 수업 안 해요? -이러다 도덕 수업 언제 해, 날 새겠네.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반이 원래 이래요. -(내 발의 붕대를 발견한 학생이) 선생님 발 다쳤어요? -왜 다쳤어요? -언제 다쳤어요? (29면)
그동안 여러 교사와 강사들이 그 반에 들어갔음에도 쓰레기 산을 어쩌지 못한 이유는, 조금만 손을 대도 민기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그냥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고 했다. 물건을 던지고 발을 쿵쾅거리며 엄청난 소동을 일으킨다고 했다.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라는,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암묵적인 원칙이 생긴 듯했다. (74면)
학교에는 욕할 거리가 많다. 만 하루, 스물네 시간을 나에게 줄 테니 학교의 문제점을 말해보라고 하면 나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면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의 문제는 어떤 한두 사람의 잘못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오랜 문화와 제도, 구조 안에 문제의 원인과 결과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선적인 해결책을 찾기도 어렵다.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그 복잡한 맥락을 함께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77-78면)
유난히 힘든 반의 수업을 마친 교사의 얼굴을 보면 활력과 생기가 쪽쪽 빨려나간 게 확연히 느껴진다. 죽음의 색과 톤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던 생기가 수업 몇 시간 만에 자취를 감추는 건 좀 무서운 일이다. 교사는 단명한다는 말은 진실일 것 같다. (78면)
학교 밖의 아이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애틋해진다. 학교에서 보지 못한 표정을 발견할 때가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있는 모습은 학교에서 약간 긴장하며 나름의 사회생활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나도 그럴 것이다. 다들 애를 쓰고 있다. 대견하고 안쓰럽고, 마음이 짠해진다. (119-120면)
지난해 1학년 선생님이 학생들을 줄기차게 성별로 구별하여 학급을 운영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공책이나 반티, 초콜릿 같은 간식을 줄 때도 여자와 남자를 반드시 구별해서 나눠주었다고 한다. 당연히 여자는 핑크색 남자는 파란색이었을 것이고, 줄은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로 섰을 것이다. 학교에는 집착적으로 학생들을 성별로 ‘분류’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것이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는 별로 없다. 어제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숫자를 따로 적게 되어 있는 학급안내판 양식을 받았다. 나는 ‘남학생 0명, 여학생 0명’을 지우고 ‘모두 16명’이라고 썼다. (122-123면)
“운동회를 진행하실 때 학생들 앞에서 외모를 평가하는 말, 특히 남자는 잘생겼다 여자는 예쁘다 하는 식으로 성별화된 외모 칭찬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약간 누르면 재생되는 기계 같은 것이다. 수년째 같은 말만 반복하는 고장난 라디오 같은 것이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 어떻게 말할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밖으로 내보낼 때는 늘 약간의 용기와 약간의 체력 소모를 감수할 결심이 필요하다. (174-175면)
저학년을 가르치는 게 좋았다. 학습의 기초, 아니 어쩌면 삶의 기초를 하나씩 가르쳐주는 일이 보람 있었다. 책상에 앉을 때는 앉은키가 가장 커지게 앉아야 한다는 것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두 발바닥이 단단하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자기 말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 친구들끼리 갈등이 생길 때는 어떤 마음이 들고 그런 마음은 어떻게 표출하는 게 좋은지, 친구들과는 왜 싸울 수밖에 없는지, 나도 어릴 때는 누구랑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외로웠는지. (195-196면)
한 무리의 아이들과 헤어지고 한 층 더 올라가는 계단참에서 지훈이를 마주쳤다. 깜짝 놀란 지훈이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눈에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선생님! 진짜 선생님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언제 와요? 나도 눈물이 난다. 아니 무슨 열 살이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고 이리 서럽게 눈물을 쏟나 싶어서. 힘든 마음을 이고 사느라 그럴 테다. 힘들 때는 그렇다.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면 눈물이 난다. 어른도 아이도 다 그렇다. 지훈이는 교사를 무척 힘들고 고되게 하는 학생이다. 나에게도 쉽지 않았지만 가장 힘든 건 본인일 것이다. (220면)
서이초 사건을 보며 그해가 떠오른 건 녹초가 되었을지언정 나에게는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3월부터 10월까지, 나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1년 내내 고생해도 안 될 수도 있다. 동연이가 끝내 나를 노려만 보다가 중학교로 갔을 수도 있다. 그저 기다리고 인내하고 기회를 주고, 지켜보고 손을 내밀고 좋은 환경이 되어주는 것. 그게 교육의 전부이다. 그러면 그 안에서 아이는 결국 자란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십수 년의 교직 생활에서 내가 믿는 건 그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교사로서 견디고, 버티고, 시도하고, 지치고, 화내고, 실망해볼 시간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도와주지 못할 거면 시간이라도 줬어야지. 시간과 기다림은 교육의 기본이자 전부인데 그걸 갖질 못하고 가셨다. (227면)
-그런데요, 왜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싫어하고 차별하는 거예요? 열 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막연히 얼굴을 찌뿌리거나 수간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고. 열 살 아이들이 응당 할 수 있는 질문을 뺏어가버린 사람들이 세뇌의 주범이다. (260-261면)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 상황이 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부릅뜬 눈들, 찌푸린 미간들, 빳빳하게 세운 몸들, 날선 목소리들로 가득 찬 교실을 상상하면 된다. 이것은 엉킨 실타래 같은 것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단단하고 복잡하게 얽혀 보기만 해도 답답해지는. (270면)
개인의 삶은 오직 개인의 것일 수 없어서 우리는 결국 서로를 돌보고 세상이 나아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가 교실에서 개별 교과 연구에만 최선을 다할 뿐 자신과 학생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세계의 부정의를 바로잡는 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면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교사는 교실 밖으로 나가 부조리한 세상과도 싸워야 한다.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을 교실 밖에서 실천하지 않는 교사의 말이 얼마나 가볍고 공허한 것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자주 생각한다. (333-334면)
학교를 둘러싼 환경이 점점 나빠진다. 학교에 따라서는 태평하게 교실 일기를 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교실도 있을 것이다. 교사와 학교를 통째로 흔들어대는 악성 민원을 피할 수 있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현 시대 교사가 갖는 최대치의 행운이 되어버렸다. […] 갈수록 힘들어지는 학교에서 교사의 마음을 놓지 않기 위해 오늘의 희망을 버텨내고 있을 동료들께 감사와 존경,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334면)










